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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그리고 잠

required 앎

시작과 끝

인간에게 시작과 끝의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는 앎이라 생각한다.

시작과 끝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앎이 닿는 순간 미분화된 연속체에 금이 간다.

끝의 종류

앎이 두 층으로 나뉘듯, 끝도 두 종류로 나뉜다.

인지되는 끝

끝이 난 것을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경우.

우리는 끝을 인지하면 식사, 흡연, 목욕 같은 의식적인 이완 행동을 취하곤 한다.

관측하기 쉬운 형태이며, 보편적으로 이것을 끝이라 부른다.

인지되지 않는 끝

무의식은 끝을 알지만, 인지의 Threshold를 넘지 못해 의식 Layer로 올라오지 못한 경우.

파편화된 사소한 정보들의 총합이기에, 의식으로는 쉽게 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아는 끝은 어떻게 관측 및 발현되는가?

잠

Threshold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필자가 사용하는 관측법은 여럿이지만, 가장 깊은 관측법은 잠이라 생각한다.

REM 수면에 도달했을 때 인지의 일부를 켜고, 근육(특히 승모근)의 이완 정도와 그에 따른 자세, 호흡 템포, 안면 근육(눈둘레근과 미간 등)을 관측한다.

이를 반복하며 현실과의 인과를 짚어가면, 무의식적 끝이 조심스레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과정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무의식적 끝에 다다른 잠은 아래와 같은 형태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끝

평온은 지옥 같던 시간의 마침표 위에 찾아온다.

이 잠은 평소의 잠과 다르다.

우린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감을 느끼며, 조금은 긴장한 채 잠에 든다.

그리고 오랫동안 뇌의 메모리에 주기적으로 할당되던 사고를 천천히 해제하기 시작한다.

기나긴 터널의 문을 닫고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는 마지막 전투.

마지막 전투를 위해 우린 따듯하고 포근한 이불에 둥지를 틀고, 태아로 돌아가 조용한 잠의 양수에 몸을 맡긴다.

목선은 베개의 함몰에 부드럽게 안기고, 머리카락은 검은 강물처럼 흐른다.

작은 몸이 이불 아래에서 파도처럼 부드럽게 넘실거릴 때.

잠에 빠진 하나의 우주는 새근새근 눈물을 흘리며, 아름답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뇌내 메모리에서 천천히 덜어낸 뒤, 뇌 깊은 곳에 땅을 파 기억의 파편을 조심스레 묻어버린다.

눈꺼풀이 꿈을 꾸듯 미세하게 떨리고, 이불 끝자락을 붙잡은 손가락이 조금씩 풀린다. 긴장이 머물던 미간이 잔잔해진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리고 숨소리만이 방 안에 남는다.

끝을 맞이한 뒤에도 인간은 성장한다. 결핍은 채워지고 상처는 아물며, 한때 삶을 지배하던 경험도 조금씩 그 무게를 잃는다.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는 그 과정을 대신 완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잠시 몸을 받쳐주는 일일 것이다.

과연 10년, 30년이 지나도 우린 오늘을 기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니길 바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있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 것은 다르다. 언젠가 이 잠이 더는 기억해야 할 특별한 위안조차 아니게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끝일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도 같은 터널을 걸을지는 알 수 없다.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길을 밟으며, 가끔 지난 시간을 회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순간 부족한 곳을 보듬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손은 꿈속에서 무언가를 찾듯 움직이다 다시 편안하게 놓인다.

잠은 정지가 아니다. 무의식이 행하는 처리이자 매장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것.

다시 앎으로

앎이 경계를 긋는다면, 잠은 그것을 지운다.

태아의 자세로 양수에 몸을 맡기는 것은 나뉘기 이전으로 잠시 돌아가는 일이다. 끝을 처리하려면 나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깨어난다.

깨어난 나는 어제의 나인가, 아니면 경계가 지워진 뒤 새로 그어진 나인가.

새로 그어졌다면, 그것을 그은 것은 다시 앎이다.